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바다가 집 앞에 있던 어린 시절

심리치유에세이(다시 시작하는삶의 기록)

by 늘파란바다 2026. 9. 4. 07:22

본문

내가 자란 곳은 울릉군 북면 현포리 신포구였다. 스무 가구 남짓한 마을에서 집 앞을 보면 바다가 있었고 뒤를 보면 높은 산이 있었다. 처음에는 초가집에 살았고 ㄱ자 모양의 함석지붕 집으로 옮겼다. 어린 시절의 집을 떠올리면 건물 하나만 생각나지 않는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던 바다와 밭, 아이들이 심부름하러 다니던 길까지 함께 떠오른다. 내게 고향은 그 생활이 이루어지던 자리다. 부모님은 바다와 밭으로 일을 나가셨다. 마을의 하루도 바람과 파도에 따라 달라졌다. 집에 남은 아이들은 집안일과 심부름을 나누어 맡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의 살림은 부모님 두 분의 노동만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까지 할 수 있는 일을 보태며 살았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 형편인지, 다른 집도 그렇게 사는지 따져 보지 않았다. 어른들이 일을 나가면 아이들에게도 남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나는 세 누나와 한 여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다섯 남매 중 넷째였지만 유일한 아들이라는 이유로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내게 필요한 것은 웬만하면 마련해 주려고 하셨다. 어린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받은 것을 기억하는 일과 그것을 마련한 수고를 헤아리는 일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다. 내게 돌아온 관심을 당시의 나는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랑받았다는 기억을 적을수록 내가 가족 안에서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도 살피게 된다. 같은 집에서 자랐어도 누나들과 여동생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나와 다를 수 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면 누나들이 나를 업고 달래며 돌보았다. 함께 자라며 싸우기도 했지만 의지했다. 누나들이 내게 해 준 일은 가족이니 당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신도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보는 일은 가벼운 몫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을 적으면서 누나들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내가 기억하는 집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나를 돌보던 시간이 들어 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때에는 이웃집으로 보러 다녔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러 가다가 크게 다쳤고, 그 뒤 부모님은 빠듯한 형편에도 텔레비전을 사 주셨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는 갖고 싶었던 물건을 떠올리지만, 지금은 그 물건을 들여놓아야 했던 부모님 쪽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때의 사정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게 필요하다고 여기신 것을 마련하려고 애쓰셨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는 조용한 분이었다. 따뜻했지만 감정이 크게 드러내지는 않으셨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마음을 쉽게 말하지 못했다. 둘이 긴 대화를 나눈 기억은 많지 않다. 성인이 된 뒤 아버지와 오징어잡이를 나간 적이 있다. 해가 지기 전과 뜨기 전에 오징어가 특히 잘 잡혔다. 바다 위에서 아버지는 반합을 큰 잔 삼아 소주를 따라 주기도 하셨다. 그 시간이 오래 남은 것은 특별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강하고 억척스러웠다. 무서울 만큼 엄격해서 어린 나는 어머니가 무서웠고 때로는 싫기도 했다. 밭일과 집안일을 하면서 자식 다섯을 돌보셨으니 쉴 틈이 거의 없었다. 다섯 아이를 먹이고 공부시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한참 뒤에야 생각했다. 지금 어머니의 수고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때 내가 느낀 두려움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어린 내가 본 어머니와 어른이 되어 돌아보는 어머니를 함께 기억하려 한다.
나도 산에 올라 마른 소나무 가지를 주워 자루에 담았다. 장작과 함께 집을 데우고 밥을 짓는 데 쓸 땔감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버거웠지만 마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부모님이 시키신 막걸리 심부름을 하러 바닷바람이 부는 길을 다니기도 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누군가의 손을 거쳐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 내가 옮긴 땔감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어린 나는 그 의미보다 해야 할 일의 무게를 먼저 느꼈을 것이다. 울릉도에서는 천궁과 취나물 같은 작물을 길렀다. 나도 밭일을 거들었지만 잠깐 돕고도 힘에 부쳐 달아난 적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을 성실하게 일만 한 아이의 이야기로 적을 수는 없다. 하기 싫은 일도 있었고, 힘들어서 피한 일도 있었다. 도왔던 일과 도망쳤던 일을 함께 떠올려야 그 시절의 내가 조금 더 정확해진다. 부모님의 수고를 알기에는 어렸고, 내 몸이 힘든 것은 바로 알 수 있는 나이였다. 학교는 바다 가까이에 있었다. 축구공이 운동장을 벗어나 바다로 떨어지면 아이들이 내려가 건져 오곤 했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는 바다는 우리에게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수영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힘이 빠져 더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느꼈을 때 동네 형이 나를 구해 주었다. 그 뒤로는 익숙한 바다가 무섭기도 했다. 날마다 가까이에서 본다고 해서 내가 그곳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사춘기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해 바닷가로 갔다. 돌을 던지고 나무 막대기로 자갈을 쳤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데 서툴렀지만 혼자 울고 생각하고 화를 낼 수 있었다. 지금도 고향의 바다를 한 가지 감정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가족의 생계가 걸린 곳이었고, 놀던 곳이었으며, 두려웠던 곳이자 마음을 쏟아 놓던 곳이었다. 집 앞의 바다는 그 여러 기억을 함께 품고 있다. 나의 이야기도 그 바다 앞에서 시작한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