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고등학교 첫 시험에서 약 580명 가운데 560등 대를 받았다. 울릉도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듣던 내게 거의 꼴찌라는 순위를 줬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너무 많았다. 같은 내가 시험을 보았는데 평가가 크게 달라졌다. 지금 돌아보면 학교가 바뀌며 비교하는 범위도 달라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숫자를 차분히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섬에서 가지고 온 자신감이 그 시험 앞에서 흔들렸다. 처음부터 포항고에 가려던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금호공업고등학교였다. 기술을 배워 삼성전자에 취업하고 일찍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싶었다. 좋은 대학으로 가는 길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내 손에 기술을 갖고 일을 시작하는 쪽에 마음이 있었다. 훗날 다른 일을 거쳐 기술을 배우게 되었지만, 그 길에 관한 생각은 이미 중학생 때부터 내 안에 있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더 큰 가능성을 보라며 포항고를 권하셨다. 오래 망설이다가 결국 어른들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그분들의 마음을 지금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나를 위해 권하셨다는 사실과 내게 다른 바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함께 남아 있다. 결정한 뒤에도 내 뜻으로 고른 학교가 아니라는 마음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는 절차는 끝났어도 내 마음의 선택까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금도 가끔 금호 공고에 갔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길에서는 모든 일이 잘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살아 보지 않은 삶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때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다시 살피게 된다. 누가 옳았는지를 뒤늦게 가리는 것보다, 내 바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결정했는지가 마음에 남는다. 선택하지 않은 학교의 이름은 내게 지나간 진학 문제이면서 처음 품었던 독립의 생각이기도 하다. 육지에 처음 나온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의 삼촌 댁을 찾아갔을 때였다. 6학년에는 어린이회장인 나와 두 명의 부회장이 함께 육군사관학교에 초청받았다. 포항고 입학시험을 보러 나온 것이 세 번째 육지행이었다. 그때까지 육지는 몇 차례 찾아간 곳이었다. 입학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중학교 친구와 함께 그 친구의 이모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녀가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며 생활해야 했다.
첫 시험의 성적을 받은 뒤 1학년 때에는 거의 공부만 했다. 친구들과 어울릴 여유도 없이 책상에 매달렸다. 그 결과 마지막 시험에서는 65등까지 올라갔다. 약 580명 중 560등 대에서 출발해 1년 안에 거기까지 간 것이다. 지금도 그때 내가 애쓴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다. 숫자로 보면 큰 변화였고 실제로 많은 시간을 쏟았다. 다만 성적표에 적힌 결과만으로 그 1년 동안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성적은 올랐지만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뒤처진 순위를 끌어올리는 일이 분명한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적이 나아진 뒤에도 공부를 계속하게 할 이유가 내 안에 충분히 남지 않았다. 열심히 했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때의 나는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결과를 얻으면 자연히 힘이 생길 줄 알았지만, 내게 남은 것은 지친 마음이었다. 하숙 생활도 힘들어졌다. 포항에서 일하던 누나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는 이미 공부에 지쳐 있었다. 생활은 조금 편해졌지만 공부가 다시 좋아지지는 않았다. 잠자리를 옮기고 가까운 가족과 지내는 변화가 있었어도 마음의 피로까지 곧바로 풀리지는 않았다. 이 대목을 돌아보면 당시의 나를 게을렀다는 말 하나로 정리하기 어렵다. 애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래 애쓴 뒤 더는 같은 방식으로 나아갈 힘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등수가 곧 내 가치처럼 느껴졌다. 순위가 높으면 인정받고 내려가면 나까지 작아지는 것 같았다. 시험은 배운 내용을 어느 정도 익혔는지 보여 주는 결과인데, 나는 그것을 내 전체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였다. 공부를 잘했던 울릉도의 나와 뒤처진 포항의 나를 서로 다른 사람처럼 여기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한 번의 순위에 담길 수 없는 생활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당시의 나는 성적표 밖에 있는 나를 충분히 보지 못했다. 2학년 말에는 200등 안팎으로, 3학년에는 300등 정도까지 내려갔다. 울릉도에서 나를 믿고 지원해 주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컸다.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해서 다시 공부할 힘이 생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안함을 느끼는 자신에게도 답답했을 것이다. 부모님의 지원을 고맙게 여기는 마음은 있었지만 성적을 올려드릴 수 없었다. 받은 사랑을 성적표로 갚아야 한다고 여길수록 나는 내게 남은 힘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듯하다. 지금 그 시절을 적는 것은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는 일이 아니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결과 뒤에 내가 겪었던 혼란과 피로도 있었다는 것을 빼놓지 않으려는 것이다. 포항고 시절을 성공이나 실패 가운데 하나로만 기억하기는 어렵다. 560등대에서 65등까지 올라간 노력도 있었고, 다시 300등 정도로 내려간 시간도 있었다. 두 성적 사이에 있었던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성적이 좋았던 때만 내 것으로 삼고 지친 때는 지워 버릴 수 없다. 내게 필요한 질문은 얼마나 올라갔느냐에만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지, 그 생활을 계속할 힘이 남아 있는지도 물어야 했다. 이제야 당시의 성적표와 함께 그 책상에 오래 앉아 있던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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