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를 그만두고 대학 친구와 시작한 고깃집은 오래가지 못했다. 준비와 경험이 부족했고 단순하지 않았다. 첫 사업을 접었지만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제대로 배워 보고 싶었다.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을 따고 울산의 뷔페식당에서 일했다. 자격증을 얻었다고 곧바로 능숙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식당에서 필요한 솜씨는 실제 일을 하며 몸에 익혀야 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큰 식당으로 옮겼을 때 내 자리는 설거지하는 곳이었다. 설거지를 맡은 사람이 네 명이나 됐지만 접시는 하루 종일 밀려들었다. 평일에도 손님이 약 천 명, 주말에는 약 삼천 명이 찾았다. 음식물이 묻은 그릇과 뜨거운 물을 만지며 미끄러운 바닥에서 하루를 보냈다. 나이 많은 신입자에게 맡겨진 첫 일이었다. 남들보다 빨리 칼을 잡으려면 우선 설거지부터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설거지를 마치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배우 김남주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말끔한 그 사람과 음식물 찌꺼기에 젖은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법학을 공부했고 다녔는데 지금은 하루 종일 설거지하고 있었다. 그날의 나는 그 차이를 초라하게 받아들였다. 설거지가 부끄러운 일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는 내가 지나온 학교와 직장이 지금의 모습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주방에서는 과거의 이력보다 당장 맡은 일을 어떻게 해내는지가 중요했다. 나는 남보다 먼저 와서 준비했고 내 일이 끝나면 윗사람의 일도 살폈다. 다음에 배울 일을 조금씩 눈에 익혀 두었다. 군대처럼 위계가 분명한 곳이라 기본을 인정받아야 다음 일을 맡을 수 있었다. 조급한 마음이 있었지만 순서를 건너뛸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일을 가까이에서 보는 시간도 배움이었다. 처음 받은 월급은 50만 원 정도였다. 금융회사에서 받던 돈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일을 옮긴 선택이 숫자로도 드러나는 것 같았지만 기술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낮은 임금과 고된 일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이 잦았다. 윗사람이 떠나면서 내게도 승진할 기회가 왔고 80만 원이 됐다. 자리가 비어 맡게 된 일이더라도 실제로 해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배운 것을 손으로 보여 주어야 했다. 지방에서 칼질해 본 경험이 있어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서울 주방의 기준은 달랐다. 재료를 썰 때는 5밀리미터 정도의 크기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크기와 모양이 일정해야 익는 속도도 맞았다. 그저 빨리 썬다고 잘하는 일이 아니었다. 속도를 내면서도 고르게 썰어야 했다. 내가 이미 안다고 생각한 일이 다시 배워야 할 일이 되는 경험이었다. 작은 차이가 음식에서는 그대로 결과로 남았다. 쟁반종이 된 뒤에는 냉면을 책임졌다. 여름이면 하루에 약 천 그릇이 나갔다. 뜨거운 물과 불 앞에서 면을 삶고 쉬지 않고 그릇을 완성했다. 많은 양을 만들어야 할수록 한 그릇을 일정하게 내는 일이 중요했다. 내가 만들던 평양식 반죽은 함흥식보다 물이 적어 무척 단단했다. 한 번 반죽을 끝내면 하늘이 노랗게 보일 만큼 지쳤다. 기술을 배운다는 말 안에는 이렇게 몸으로 감당하는 노동도 들어 있었다.
만두를 만들 때는 새벽 5시쯤 일어나 소를 준비했다. 처음에는 재료를 감으로 넣었다.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는 맛이 달라지기도 했다. 손에 익었다고 믿었던 감각이 내 상태에 따라 흔들렸다. 잘 만든 날의 경험만으로 늘 같은 맛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됐다. 손님은 내가 전날 어떻게 지냈는지와 상관없이 음식을 받는다. 만드는 사람의 사정이 음식의 차이가 되지 않게 할 방법이 필요했다. 전자저울을 가져와 재료마다 양을 재고 비율을 정리했다. 누가 만들더라도 같은 맛이 나도록 조리법을 맞췄다. 그 뒤 만두 맛이 일정해졌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저울은 내게 분명한 변화를 가져온 도구였다. 익숙한 감각만 믿던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었다. 요리를 잘하고 싶은 마음을 재료의 양과 비율로 옮겼다는 점에서, 나 자신에게도 이해할 수 있는 진전이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월급의 변화만이 아니다. 감으로 넣던 재료를 재기 시작하면서 일의 결과를 확인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만두 맛이 달라지는 이유를 내 솜씨가 부족하다는 말로만 덮었다면 같은 문제가 남았을 것이다. 어떤 양을 넣었는지 확인하고 다시 쓸 수 있게 정리하자 고칠 부분이 보였다. 배운 기술을 유지하는 데에는 이런 확인도 필요했다. 주방의 총책임자가 수원의 한 식당을 소개해 주었다. 서울에서 50만 원으로 시작해 80만 원까지 받았던 월급이 수원에서는 180만 원이 됐다. 내 기술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직장 이름을 꺼내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월급이 오른 것도 기뻤지만, 낮은 자리에서부터 익힌 일이 다른 식당에서도 필요한 기술이 됐다는 사실이 컸다. 손에 남은 경험을 가지고 옮겨 갈 수 있었다. 수원에서 약 1년을 일하고 나니 가족이 있는 부산이 그리웠다. 부산으로 돌아와 뷔페에서 일했고 동아대 법학과 선배가 연 울산의 식당에서도 약 1년을 보냈다.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맛에 대한 손님의 반응을 바로 받는 일이 좋았다. 고되고 오래 일해야 했지만 내게 잘 맞았다. 기술이 늘수록 내 가게를 갖고 싶어졌다. 다만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습관은 그대로였다. 요리 솜씨가 늘었다고 내 생활의 모든 문제가 함께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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