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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절창 독서 후기 마음을 안다는 것과 용서한다는 것은 달랐습니다

책 영화 공연으로 마음 읽기

by 늘파란바다 2026. 10. 2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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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다면 관계의 오해도 사라질까요. 구병모의 《절창》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반대의 질문을 붙들었습니다. 상대를 더 많이 아는 것이 그 사람을 함부로 다룰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상처를 통해 내면을 읽는 능력이 등장하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알 수 없는 마음의 여백이었습니다. 이 글에는 소설의 후반부와 결말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전한 집이라는 말 속에 숨은 통제
《절창》은 2025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구병모의 장편소설입니다. 제목은 베인 상처를 가리킵니다. 아가씨라 불리는 여성은 타인의 상처에 닿아 그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녔고, 문 오언은 그 능력을 이용합니다. 이 집에 독서 선생님이 들어오면서 관계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저는 기이한 설정 자체보다 보호와 지배가 같은 얼굴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머물 집이 있고 물질적인 돌봄을 받는다고 해서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택권과 외부로 나갈 가능성이 제한된 삶을 두고 단지 잘해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읽는 동안 도움받는다는 사실이 거절할 권리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할수록 그 관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질문도 남았습니다.
아가씨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장면들은 이해의 아름다운 비유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동의하지 않은 비밀을 강제로 얻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보를 얻는 일과 한 사람을 존중하며 알아가는 일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느꼈습니다. 상대에 관해 많이 안다는 확신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직접 묻고 듣는 과정을 생략하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능력이 관계의 윤리를 대신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정중한 존댓말 안에서 더 선명해진 불안
독서 선생님의 내면이 정중한 존댓말로 전해지는 형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마주 앉혀놓고 조심스럽게 고백하는 듯했습니다. 말투는 차분한데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감정은 차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온도 차이 때문에 문장을 더 천천히 읽었습니다. 화자의 예의 바른 목소리가 곧 마음의 투명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긴장이 생겼습니다.
표현의 감각도 오래 남았습니다. 놀랐다는 설명보다 신체가 흔들리거나 표면이 벗겨지는 듯한 비유가 먼저 다가왔습니다. 어떤 문장은 뜻을 머리로 정리하기 전에 몸으로 반응하게 했고, 저는 따로 옮겨 적으며 다시 읽었습니다. 이 글에서 문장을 길게 재현하기보다 제가 받은 감각을 적고 싶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제게 매력적이었던 것은 화려한 표현의 수가 아니라 정중한 말투 안으로 불안을 밀어 넣는 방식이었습니다. 독서 선생님의 사정이 드러나면서 이전의 말도 다르게 들렸습니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화자에게 어떤 시간이 있었는지 알게 되면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렇다고 뒤늦게 알게 된 사실 하나가 그 인물의 모든 말과 행동을 해명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을 이해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마다 다시 모르는 부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속도는 사건을 알아가는 속도와 별개로 느려지기도 했습니다.
상처를 이해하는 일과 용서의 결정을 나누기
책을 덮으며 가장 오래 생각한 문제는 용서였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정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일과 그에게 받은 상처를 용서하는 일은 같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배경을 알면 분노의 모양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화해할지, 관계를 이어갈지, 거리를 둘지는 상처 입은 사람이 정할 문제로 남습니다. 이해가 곧 용서의 의무가 되는 순간에는 또 다른 강요가 생길 수 있겠습니다.
상처가 관계를 깊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할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일을 두고 꼭 필요한 성장 과정이었다고 대신 의미 붙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고통을 겪은 뒤 누군가 스스로 의미를 찾는 것과, 다른 사람이 고통의 가치를 정해주는 것은 다릅니다. 소설에서 읽은 은유 역시 상처받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법칙으로 가져오지는 않으려 합니다.
한 사람의 상처가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도 붙들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아는 것은 현재의 반응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불쌍한 사람이라는 자리로만 고정하면 지금의 판단과 능력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아픈 사정을 이유로 타인에게 한 행동의 책임까지 지워버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저는 연민과 책임이 서로를 없애지 않고 함께 놓일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속삭임을 내 해석으로 닫지 않기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능력은 언뜻 완전한 이해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 능력이 오히려 사람의 경계를 침범하는 데 쓰입니다. 상대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과 그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의 차이가 선명해지는 대목입니다. 책을 함께 읽는 시간이 다른 관계의 가능성으로 느껴지는 것도, 누군가에게서 강제로 빼앗지 않은 말을 주고받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의 끝에서 들리지 않는 말이 남는 방식도 좋았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사랑이나 용서로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인물의 마음을 알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지만, 독자에게 허락되지 않은 마지막 말이 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소설이 답을 숨겨놓았으니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기보다, 제 해석으로 다 가져갈 수 없는 관계를 남겨두었다고 느꼈습니다. 마지막 속삭임을 알 수 없다는 점 역시 독서의 아쉬움보다는 작품이 남겨둔 경계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인물의 사정을 오래 따라왔지만, 그렇다고 마지막 마음까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되 제 해석을 유일한 진실로 만들지 않는 태도가, 상처 입은 타인 앞에서도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에서도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면 말보다 해석이 앞서곤 합니다. 왜 그랬는지 이미 알겠다고 판단하고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는 것이 무관심과 다르다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짐작한 마음을 사실처럼 선언하는 대신 상대가 설명할 기회를 남기는 태도입니다. 물론 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은 영역도 존중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책을 읽는 관계가 다른 가능성으로 느껴진 이유도 여기에 있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알아내는 대신 문장을 사이에 두고 묻고 답하는 시간이 생깁니다. 같은 글을 어떻게 읽는지 들으며 조금씩 알아가되,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관계입니다. 읽는다는 행위가 책의 내용을 얻는 일에서 사람과 만나는 방식으로 넓어졌습니다. 저는 화려한 능력보다 그런 느린 대화가 자유롭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독서 선생님에게도 자신의 목적과 비밀이 있으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순수한 구원으로 정리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에서 생기는 긴장을 끝까지 놓지 못했습니다.
《절창》은 제게 관계를 쉽게 정리하는 문장보다 조심스러운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해했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추측이 섞여 있는지, 위로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용서를 요구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했습니다. 책장을 덮었다고 해서 인물의 마지막 마음까지 제 것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남겨진 거리가 오히려 이 작품을 오래 생각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참고 자료: 구병모, 《절창》, 문학동네(2025). 국립산림과학원 도서관 서지 및 도서 소개. https://book.nifos.go.kr/main.do/10110/contents/7548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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