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이 회사의 막내 인턴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저는 전쟁터의 이순신을 함께 떠올렸습니다. 《인턴》과 《명량》은 전혀 다른 영화입니다. 그 두 얼굴이 제 안에서 만난 지점은 책임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선 사람은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자리가 낮아진 뒤에도 어떤 태도를 지킬 수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드는 일과 좋은 어른이 되는 일이 저절로 같아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오래 일한 사람이 다시 배우는 자리에 앉을 때
김도영 감독의 한국 영화 《인턴》에서 최민식은 은퇴 후 인턴으로 일하는 기호를, 한소희는 젊은 대표 선우를 연기합니다. 익숙한 경력의 질서와 새 회사의 업무 질서가 뒤바뀌는 설정입니다. 나이는 기호가 더 많지만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저는 그가 모르는 것을 감추려 하기보다 배우는 자리에 머무는 모습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오래 일한 경험은 분명 자산일 것입니다. 다만 과거에 잘했던 방식이 현재의 모든 문제에도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호의 매력은 경험을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경험과 무지를 함께 인정하는 데 있다고 느꼈습니다.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곁에서는 다른 사람도 질문하기 쉬워집니다. 저 역시 나이를 먹을수록 모른다는 말을 얼마나 편하게 할 수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게 됩니다. 선우에게는 반대 방향의 무게가 보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대표가 되었지만 마음의 부담까지 없애주지는 않았습니다. 회사와 가정에서 생긴 문제를 홀로 감당하려는 얼굴이 지쳐 보였습니다. 저는 외적으로 단단해 보이는 사람이 도움을 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할이 커졌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어려움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위로가 모든 책임을 대신 짊어지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일본 출장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선우가 자신에게 과도한 책임을 돌릴 때 기로는 그 자책을 그대로 받아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 말을 정확한 대사로 옮기기보다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잘못과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을 구분해 보자는 뜻입니다. 무조건 괜찮다고 덮는 말보다 상황을 나누어 바라보게 하는 태도가 더 든든했습니다.
자책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하는 것 역시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고칠 부분이 있다면 살피되, 남의 행동까지 자기 존재의 결함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도록 돕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기호의 말이 제게 따뜻했던 것은 상대를 무조건 치켜세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는 속도를 잠깐 멈추게 했기 때문입니다.
기호의 경청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상대를 서둘러 고쳐야 할 대상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우가 어렵게 꺼낸 말을 자신의 무용담을 펼칠 기회로 삼지 않고, 그 사람이 감당하고 있는 몫을 먼저 살핍니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도 타인의 현재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라는 태도가 대화의 자리를 열어줍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은 답을 준비하기보다 질문을 끝까지 들을 여유를 잃지 않고 싶습니다. 경청에도 상대의 선택을 남겨두는 일이 중요하겠습니다. 경험 많은 사람이 답을 알고 있다고 느껴도, 상대는 그 답이 만들어진 시절과 다른 조건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제 경우에는 이랬다는 경험이지, 당신도 반드시 이렇게 하라는 판정은 아닐 것입니다. 도움을 원하는지부터 묻고, 원하지 않는 충고를 길게 이어가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말의 양보다 대화 뒤에 상대에게 남은 자유를 살피겠습니다.
스무 번 넘게 읽었던 이순신과 다시 만난 얼굴
울릉도의 작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읽을 책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순신 장군 전기를 스무 번 넘게 반복해서 읽으며 동경을 품었습니다. 어릴 때는 싸움에서 이기는 용기와 승리에 마음이 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명량》을 보고서는 그 승리 앞에 놓인 고뇌를 더 크게 느꼈습니다. 최민식의 얼굴에서 제가 본 것은 흔들리지 않는 영웅만이 아니라 흔들려도 판단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군율을 적용하는 장면과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책임에는 남이 잘 보지 못하는 고독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영화의 장면은 영화의 해석이며, 역사 속 이순신의 내면을 그대로 복원한 자료는 아닙니다. 제가 어린 시절의 전기와 영화에서 각각 무엇을 받아들였는지를 구분해 두고 싶습니다. 두 작품은 제 삶의 다른 시기에 만났고, 그래서 같은 인물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명량》의 지도자와 《인턴》의 신입을 같은 이상적인 어른으로 묶는 데에는 한계도 있습니다. 전장과 회사의 관계는 다르고 명령이 필요한 상황과 대화가 필요한 상황도 다릅니다. 그 차이를 지운 채 무조건 따르거나 희생하라는 교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게 이어진 것은 행동의 동일함보다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쓸 것인지 묻는 태도였습니다. 상대를 누르기 위해 경력을 사용하는지, 필요한 책임을 맡기 위해 사용하는지의 문제였습니다.
어른의 품격을 오늘의 대화에서 살피기
장군의 책임과 인턴의 배려는 규모가 다르지만,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높은 자리에 있을 때만 책임이 생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의 실수를 조용히 도와주거나 지친 사람에게 함부로 책임을 더하지 않는 일도 오늘 제가 설 수 있는 자리에서의 선택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의 범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모르는 것을 숨기던 사람도 질문할 용기를 얻습니다. 좋은 어른이라는 말이 또 하나의 완벽주의가 될 필요는 없겠습니다. 언제나 침착하고 언제나 정확한 말을 하는 사람은 되기 어렵습니다. 저도 말을 앞세우거나 상대의 마음을 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 들을 수 있는지가 더 현실적인 기준일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과할 기회를 잃고 싶지는 않습니다. 또한 어른이 된다는 일을 끝없이 타인의 문제를 떠맡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알아야 도움도 오래 이어집니다. 모르는 문제에는 전문가나 다른 도움을 연결할 수 있고, 제 경험 밖의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호의 안정감에서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결하는 능력보다 상대를 혼자 두지 않으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태도입니다. 기호와 선우를 보며 도움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기호는 새로운 환경에서 배우고 선우는 경청의 자리를 얻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주기만 하고 젊은 사람은 받기만 한다고 나누면 서로에게 배울 가능성도 좁아집니다. 저 역시 조언하는 위치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세대에게 기꺼이 더 배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 나타났을 때 먼저 틀렸다고 말하기보다 왜 그렇게 하는지 물을 수 있겠습니다. 그 질문 안에서 과거의 경험도 새로운 쓰임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품격 있게 나이 든다는 말이 조금 구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새 도구 앞에서 물어보고, 대화에서 말을 가로채지 않으며, 힘든 사람에게 불필요한 책임을 더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위대한 장군을 닮고 싶었다면 지금은 제 곁의 사람이 편하게 질문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최민식의 두 얼굴 사이에서 제가 가져온 것은 커다란 무용담보다 오늘의 말을 조금 늦추는 마음입니다.
참고 자료: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인턴》 2차 예고편. https://www.youtube.com/watch?v=dtpyrKDJP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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