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형경의 『꽃피는 고래』를 읽으며

책 영화 공연으로 마음 읽기

by 늘파란바다 2026. 10. 6. 20:32

본문

김형경의 『꽃피는 고래』를 읽으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기억과 떠나보냄에 관한 말이었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하나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 기억하려면 붙잡아야 할 것 같고, 떠나보내려면 잊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두 마음이 함께할 수 있을까. 주인공이 슬픔을 겪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그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부모를 잃은 주인공의 슬픔은 한 번의 울음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었다.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 사람과 나누던 평범한 하루부터 달라질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무언가를 보고 이야기하고 싶을 때도, 돌아갈 집을 생각할 때도 빈자리가 느껴질 수 있다. 앞으로 맞이할 졸업과 결혼 같은 중요한 날에도 그 자리는 다시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주인공이 부모를 원망하고 자신에게 남겨진 슬픔에 마음을 빼앗기는 모습은 그래서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그 마음을 두고 빨리 잊고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부모에게도 소중한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헤아리기 시작한다. 엄마가 사랑했던 강아지와 아빠가 좋아했던 바다를 떠올리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에게 부모는 자신을 두고 떠난 사람들이지만, 부모에게도 두고 떠나야 했던 것들이 있었다. 더 살아가고 싶었을 마음과 이루지 못한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의 죽음을 자신의 상실로만 바라보던 시선이 부모의 삶으로 넓어지는 모습에서, 나는 기억하는 일이 누군가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함께했는지 떠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두려워했으며, 어떤 하루를 바라며 살았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기억의 한 부분일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를 내 곁에 있어 주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그에게도 자신만의 기쁨과 걱정, 꿈과 아쉬움이 있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변화를 보며 나는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살아 있을 때 조금 더 궁금해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장포 수 할아버지가 오래된 물건들을 붙잡고 있었다는 고백도 오래 남았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은 그 사람이 아직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물건을 놓으면 함께한 시간까지 사라질지 두려웠을 것 같았다. 겉으로 보면 낡고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누군가에게는 목소리와 표정을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기억일 수 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정리하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다. 그 물건에 담긴 시간을 알지 못한 채 필요와 쓸모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억은 물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웃었던 순간, 마음을 알아주었던 말, 별일 없이 나란히 보냈던 하루는 마음에도 남는다. 물건을 놓는 날이 오더라도 그런 기억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책 속의 말을 통해 기억을 간직하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꼭 붙잡아야 그 사람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떠오르는 얼굴과 따뜻했던 말만으로도 함께한 시간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잘 떠나보낸다는 말을 서둘러 슬픔을 끝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운 날에는 울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다시 마음이 아플 수 있다. 웃으며 하루를 보냈다고 사랑이 옅어진 것은 아닐 것이고, 다시 울었다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도 아닐 것이다. 슬픔은 매일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화가 나고, 어떤 날에는 기운이 없으며, 잠깐 편안해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음들을 억지로 정리하려 하기보다, 오늘 느끼는 감정을 알아주면서 생활을 이어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부모의 묘역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장면은 특히 뭉클했다. 부모가 이제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졸업과 결혼에 함께 하지 못할 부모를 떠올리며 다시 슬퍼한다. 그러다 부모가 자신의 졸업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자신이 부모 없이도 졸업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옮겨간다. 부모가 돌아오지 않는 현실은 같지만, 문장의 주어가 바뀌면서 앞으로 살아갈 자기 삶이 눈앞에 놓인다. 그 변화가 주인공에게 앞으로 살아갈 힘을 주는 것 같았다.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하는 모습에 마음이 움직였다.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데도 등을 곧게 펴던 주인공의 모습은 책을 덮은 뒤에도 선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슬픔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삶을 미뤄두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리움을 품고도 학교에 가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기쁜 일이 생기면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부모가 다시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주인공이 자신에게 찾아올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마음속에 부모를 간직한 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응원하고 싶었다. 영호 언니의 짧은 문자도 그런 걸음을 돕는다. 따뜻한 국물을 먹으라는 안부와 평범한 일상의 소식이 주인공을 침대에서 일어나게 한다. 상대의 고통을 모두 설명하거나 해결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 작은 관심은 오늘 하루를 시작할 힘이 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도 밥은 먹었는지, 오늘은 어떻게 지냈는지 물을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 하루를 궁금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혼자 견디는 듯했던 마음에 작은 온기가 생길 수 있겠다고 느꼈다.
떠난 사람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은 지금의 하루를 함께 바라봐줄 수 있다. 한 번 좋은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 끝내기보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사람의 하루를 궁금해하고 싶다. 겉으로 웃는다고 마음이 다 편안해졌다고 짐작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날에는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곁을 지키는 일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돌아보았다. 인제 그만 잊으라는 말은 그 사람이 소중히 간직한 시간까지 내려놓으라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앞으로 누군가 떠난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면,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하더라도 조용히 듣고 싶다. 어떤 모습으로 웃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어떤 말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는지 함께 기억해 주고 싶다. 적절한 대답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놓쳤을 마음을 조금 더 살피려 한다. 떠나보내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내 기준으로 그 마음을 재촉하지 않으려 한다. 내 마음이 힘든 날에도 이 책에서 본 작은 행동들을 떠올리고 싶다. 당장 마음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따뜻한 밥을 챙겨 먹고, 흐트러진 주변을 정돈하고, 오늘 해야 할 일 하나를 해보려 한다. 그런 행동으로 모든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이 작은 안부에 힘을 얻어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듯, 나도 하루를 살아가는 일에서 다시 힘을 찾고 싶다. 기운이 없는 날에는 잠시 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움직이면서 내 마음을 천천히 살펴보려 한다.
『꽃피는 고래』는 내게 기억의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한다는 말에는 함께했던 시간을 간직하며 앞으로의 삶도 살아가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소중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를 돌보고, 그 사람에게 배웠던 다정함을 다른 사람에게 건넬 때도 기억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할까. 사랑했던 사람의 삶을 헤아리고, 그 사람과 나눈 사랑을 오늘의 삶으로 이어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모를 생각하며 울면서도 등을 곧게 펴던 주인공처럼, 소중한 기억을 마음에 두고 나의 하루도 정성껏 살아가고 싶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