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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통과 5밀리미터의 칼질 손으로 다시 배운 자신감

심리치유에세이(다시 시작하는삶의 기록)

by 늘파란바다 2026. 10. 21.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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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음식점이 문을 닫은 뒤 저는 조리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큰 식당의 신입으로 들어갔습니다. 법학을 공부했고 일했다는 경력은 그곳의 기본 업무를 대신해 주지 않았습니다. 당장 배워야 할 것은 눈앞의 그릇과 재료를 다루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어른이 된 제가 다시 모르는 사람의 자리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평일에는 천 명, 주말에는 삼천 명가량 손님이 오는 식당이었습니다. 설거지를 맡은 네 사람이 하루 종일 움직여야 했습니다. 뜨거운 물과 음식물 찌꺼기 사이에서 작업복은 젖었고, 그릇은 계속 밀려왔습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가 깨끗하고 화려한 모습의 유명 배우가 지나가는 장면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 모습을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부끄러웠던 것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기억 속의 그 장면을 다시 보면, 제가 느낀 부끄러움은 설거지가 부끄러운 일이어서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삶과 현재의 모습 사이에 간격이 컸기 때문입니다. 한때 법전을 읽고 금융회사에 다니던 제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묻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는 육체노동을 낮게 보던 제 기준도 섞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기준까지 함께 돌아봅니다. 설거지를 가장 낮은 일이라고 부르면 그 일을 오래 해온 사람의 숙련과 책임도 작아집니다. 손님이 안전하게 식사하려면 그릇을 제대로 씻는 일이 빠질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잠시 거치는 단계가 아니라 오래 맡아온 전문적인 생활입니다. 제가 다시 배웠다는 의미를 이야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바닥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날 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맡은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순간 모든 열등감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비교하는 마음은 다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제 모습을 평가하는 생각과 지금 해야 할 행동을 잠시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완전히 정리된 뒤에야 그릇을 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은 제 생각과 다른 속도로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구체적으로 배우는 시간
처음 받던 월급은 오십만 원이었습니다. 저는 제 업무를 마친 뒤 선임자의 작업을 살피고 도우며 다음 일을 배웠습니다. 사람이 떠나 자리가 비었을 때이어서 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준비가 보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찍 끝내고 더 오래 남는 사람만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 경험에서 의미 있었던 것은 무조건 일을 느린 행동보다 필요한 기준을 미리 익힌 과정입니다.
주방에서는 잘한다는 평가가 손의 움직임과 연결되었습니다. 재료를 어떤 크기로 써는지, 비율을 어떻게 맞추는지, 불을 어느 정도로 다루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막연히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만으로는 결과가 일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달랐는지 눈으로 보고 손이 익숙해질 때까지 다음 동작에서 고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서울의 큰 주방에서 재료를 오 밀리미터 간격으로 고르게 썰던 기준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조금만 다르면 익는 시간과 식감에 차이가 날 수 있었습니다. 저울로 양을 맞추고 기록하는 과정은 감에만 기대던 작업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저는 제가 부족하다는 평가보다 어느 부분이 얼마나 달랐는지 알 때 더 잘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움은 저 자신을 보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번 잘못 썰었다고 제가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칼을 쥐는 방식이나 간격을 살펴 다음 작업을 바꾸면 됩니다. 모든 삶의 문제가 그렇게 명료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결과를 수정하는 일과 사람을 벌하는 일은 다르다는 감각을 손끝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몰입의 기쁨과 몸의 부담을 함께 기억합니다
여름철 하루 천 그릇의 냉면을 내고, 단단한 평양식 냉면 반죽을 치대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노동의 강도는 높았습니다. 그 일을 회상할 때 손을 움직이는 순간의 집중은 기억하지만, 몸이 고됐다는 사실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바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고통이 컸기 때문에 반드시 더 많이 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재료와 불에 집중하는 동안 과거의 실패를 잠시 잊을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덜 났다는 사실과 마음의 상처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사실은 다릅니다. 일이 끝난 뒤에는 여전히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몰입은 제게 도움이 된 경험의 하나였지만, 고된 노동 자체를 누구에게나 효과가 있는 치유법으로 권할 수는 없습니다. 작업을 잘하려는 마음이 다시 제 몸을 몰아붙일 수도 있습니다. 실수가 걱정되어 쉬지 못하거나 먼저 인정받으려고 일을 계속 보태면, 기본기를 익히던 기쁨이 또 다른 압박이 됩니다. 숙련에는 쉬면서 집중을 회복할 시간과 안전한 작업 조건도 필요합니다. 기술을 오래 쓰고 싶다면 그 기술을 수행하는 몸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더 절실하게 알았습니다. 밴듀라는 자기효능감의 중요한 근거로 실제 수행 경험을 제시했습니다. 제게 그릇을 씻고 일정한 크기로 재료를 다듬은 기억은 무슨 일이든 해낸다는 자신감보다, 모르는 일을 나누어 배울 수 있다는 감각을 남겼습니다. 특정한 기술을 익힌 사실을 삶 전체의 보장으로 확대하지 않을 때 그 기억을 더 현실적으로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드백을 받을 때도 작업에 대한 말과 사람에 대한 모욕은 구별해야 합니다. 부족한 동작을 고치는 데 필요한 설명은 배움의 자료가 되지만, 무시하는 말을 참아야 기술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고개를 숙여 배우던 기억을 이야기하면서도 배움의 조건에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을 함께 남기고 싶습니다. 잘못된 동작을 고치는 동안에도 제 존중받을 자리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주방을 떠나서도 가져갈 수 있었던 것
훗날 조선소에서 전혀 다른 기술을 배울 때 주방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구도 재료도 달랐고 새로 배워야 할 기준이 많았습니다. 다만 수치와 실제 결과를 맞추려는 습관, 모르는 지점을 구체적으로 물으려는 태도는 다시 써볼 수 있었습니다. 기술이 저절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방식의 일부가 다른 자리에서 도움이 된 셈입니다.
이런 연결을 찾을 때도 과거의 모든 시간이 필요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 사업에서 잃은 것과 주방에서 얻은 것은 각각 남아 있습니다. 배움을 찾았다고 손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두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현재에 쓸 수 있는 힘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새로운 일을 배우는 사람에게 제 이야기를 건넨다면 자존심을 버리라는 말부터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존중받고 싶다는 마음은 지켜야 합니다. 다만 과거의 경력이 지금의 기본기를 대신할 것이라는 기대는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고 설명을 구하는 태도는 자신을 낮추는 일보다 제 일을 정확히 배우려는 행동에 가깝습니다. 젖은 작업복과 설거지통의 기억은 제게 여전히 선명합니다. 그곳에서 저는 일을 통해 제 가치를 새로 증명했다기보다, 익숙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채로도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릇 하나와 칼질 한 번을 고쳐가며 배운 방식은 지금도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다음 자리를 약속해 주지는 않아도, 다음에 배워야 할 일을 바라보는 제 태도를 바꾸어준 기억입니다.
참고: Bandura, A.(1977), 「Self-efficacy: Toward a unifying theory of behavioral change」. https://pubmed.ncbi.nlm.nih.gov/84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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