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오른쪽 어깨가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소에서 기술을 익히고 책임자가 되기까지 나는 일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고 쉬지 않고 일한 시간도 길었다. 몸은 그 생활을 따라와 줄 것처럼 여겼다. 어깨를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나서야 내 뜻만으로 계속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눈앞에 놓였다. 맡은 일이 있다는 이유로 통증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진주의 병원에서 수술받았다. 회사의 총괄책임자는 바쁘시기에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나를 나무랐다. 충격을 받았다. 회사 일을 하느라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아픈 것까지 내 잘못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느꼈다. 몸이 고장 나기 전에는 오래 일하는 나를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수술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자 그동안의 노력이 내가 쉴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수술한 지 열흘쯤 됐을 때 회사에서 일이 급하다며 빨리 복귀하라고 했다. 통증은 심했지만 돌아갔다. 충분히 나을 때까지 쉬겠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오래 자리를 비우면 내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았고, 동료들에게 일을 떠넘기는 마음도 들었다. 당장 필요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마음과 빠진 사람의 몫을 누가 감당할지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내 회복은 뒤로 밀렸다. 다시 일을 시작했어도 몸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통증은 그대로 남았다. 지금 돌아보면 출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나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때는 일터에 돌아가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처럼 보였다. 내 몸의 사정과 현장의 사정이 다를 때 어느 쪽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 정리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내가 감당하는 어려움을 더 키우고 있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조선업이 어려워지면서 내가 다니던 회사도 흔들렸다. 약 1,500명이던 인력이 줄었다. 한 사람이 일을 잘하고 오래 버틴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변화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마흔여섯에 아들을 얻었다. 기뻤고 걱정됐다. 아버지가 됐다는 기쁨을 느끼면서도 내가 계속 돈을 벌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가족을 위해 지키고 싶은 것이 커지는 때에 일터의 형편은 불안해졌다. 회사가 사실상 문을 닫은 뒤 약 6개월 동안 실업급여를 받았다. 회사가 다시 문을 연다는 소식은 쉽게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생활비는 필요했다.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이 내 몸과 앞으로의 일을 충분히 정리할 시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앞으로 다시 일할 곳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점이 막막했다. 손에 익힌 기술이 있어도 그 기술을 쓸 현장이 열려 있어야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생활비를 벌려고 택배 일을 시작했다. 이미 몸이 많이 상해 있어서 배송은 힘에 부쳤다. 그래도 일을 이어 갔다. 약 6개월을 버티던 무렵 회사가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조선소로 돌아갔다. 처음 배우러 갔을 때와는 달리 이미 익힌 기술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일하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낯선 일보다 내가 잘 아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도 마음이 움직였다. 돌아간 현장의 인력은 예전의 약 3분의 1이었다. 원청이 요구하는 기준은 더 엄격해졌다. 회사는 삼성과 대우, 현대 계열의 물량까지 받아 고성중공업이라는 이름으로 버티려 했다. 현장이 다시 움직인다고 이전의 조건까지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일은 많았고 부족했다. 복귀하면 조금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몸이 좋지 않아도 쉬기는 더 어려워졌다. 익숙한 곳에 돌아왔다는 안도만으로 감당하기에는 달라진 것이 많았다. 이후에는 무릎 수술도 받았다. 이번에도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채 일터로 돌아왔고 점점 심해졌다. 어깨가 아플 때와 비슷하게, 쉬어야 한다는 필요보다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압박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이제 와서 그때 잠시 멈췄다면 모든 일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아픈 상태를 인정하고 회복할 시간을 확보하는 일 역시 내 생활을 지키는 문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소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어린 아들을 떠올리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일을 멈추면 가족은 어떻게 살아갈까. 그 질문 앞에서는 당장의 통증보다 다음 생활비가 더 크게 느껴졌다. 다른 길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만두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없었다. 당시의 나를 무조건 무모했다고만 말하기도 어렵다. 가족을 책임지고 싶었고,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은 아픈 몸을 움직여 계속 버는 일이었다. 어깨 수술 뒤의 복귀와 무릎 수술 뒤의 복귀를 나란히 적고 보니 같은 선택이 반복됐다는 것이 보인다. 돌아갈 때마다 현장과 생계의 사정이 내게 중요했다. 회사가 바쁘고 사람이 부족하고 가족의 생활비가 필요했다. 그 사정들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통증이 남아 있는 내 몸도 있었다. 급한 일을 해결하는 동안 계속 미뤄 둔 문제는 내 몸에 남았다. 그때 나는 아파도 돈을 버는 것이 가장의 책임이라고 믿었다. 벌이를 이어 간 마음으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지만 돌보는 일은 책임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지금은 그 생각이 얼마나 좁았는지 돌아본다. 가족과 오래 살아가려면 돈을 마련하는 시간뿐 아니라 회복을 기다리는 시간도 필요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쉬라는 말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안다. 그래서 아픈데도 일하는 사람을 보면 먼저 그가 무엇을 걱정하며 자리를 지키는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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